춥다.
드디어 겨울이 왔나보다.
계단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는 건 봄이 제격이지만, 태양이 필요한 건 확실히 겨울이다.
하늘이 자주 가라앉는 날이 많아 마음도 따라 가라앉기 때문이다. 여기에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이다.
그러니 진짜 태양이 필요한 계절은 겨울이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The Alan Parsons Project의 1982년 앨범 「Eye In The Sky」(Arista, 1982).
처음 이 앨범을 만났을 때, 커버를 장식한 저 문양은 뜬금없어 보였다. 썰렁했다. 그렇게 멋져보이지 않는 저 문양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것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저건 태양신 라
Ra를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표식이고 문양이라는 걸. 하지만 깊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스/로마 신화조차도 신의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로 불러서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집트의 신화까지 기억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혹시라도 라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이집트 신화를 읽거나 위키를 방문해보길.
그제야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앨범 타이틀이 이해가 갔다. 우리를 바라보는 태양신 라의 이야기에 빗대어 만든 노래라는 걸. <Eye In The Sky>는 싱글로 발표되어 대단한 인기를 얻었는데, 싱글로 똑 떼어내서 듣기보다는 <Eye In The Sky>의 인트로 격인 <Sirius>와 이어서 들어야 더 맛이 난다.
(※ 추가:
위키에 소개된 이 곡의 내용에서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Sirius>와 <Eye In The Sky>이 접속곡이라는 사실로 유추해 보면 <Eye In The Sky>는 앨범 커버와 연관된 태양신 Ra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우습게도 알란 파슨스의 앨범 커버를 다시 떠올린 것은 게임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이 게임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가끔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접속해서 하기도 하는, 포트리스2 블루.
여러 맵이 있는데, 지금 이 캡처화면은 스핑크스 맵.
바람의 방향에 따라 떨어지는 문양의 위치가 바뀌는데, 이 맵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바로 라 문양이었다. 게임 기획자가 이집트의 문화에 대해 뭔가 아는 모양이다. 맵 이름은 물론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문양을 이집트 문화에서 가져온 걸 보면.
이 문양은 이후 몇몇 앨범 커버에서 다시 등장한다.
아브락사스 풀 Abraxas Pool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Abraxas Pool」(Miramar, 1994)의 앨범 커버.
이 밴드는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 Santana의 존재감이 거의 없던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이들이 잠시나마 주목받은 건 산타나를 거친 멤버들, 이를테면 마이크 슈리브 Mike Shrieve, 닐 숀 Neal Schon, 그렉 롤리 Gregg Rolie, 호세 아레아스 Jose "Chepito" Areas, 알폰소 존슨 Alphonso Johnson, 그리고 마이크 카라벨로 Mike Carabello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브락사스 풀은 산타나보다 더 산타나다운 밴드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소식이 끊어졌다......
아브락사스 풀보다 앞서 1990년에 라의 문양을 커버에 담은 앨범을 발표한 시스터스 오브 머시
The Sisters Of Mercy의 앨범 「Vision Thing」(Merciful Release/EastWest, 1990)도 있다.
고스록
goth rock 밴드들이 인디 씬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에 등장해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한 밴드의 마지막 세 번째 앨범. 하지만 이들의 음악이 차트를 흔들만큼 위력적이지 않은 스타일이어서였는지 그동안 앨범 커버 외에는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진 않았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커버가 무거운 주제를 화사한 색으로 표현한 것에 비해 시스터스 오브 머시의 앨범 커버는 밴드의 음악 스타일만큼 어둡고 무겁다.
여기서 잠깐!!
독일 출신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라기보다는 스페이스 록 space rock 스타일 밴드)로 널리 알려진 엘로이 Eloy는 앨범 타이틀을 「Ra」(Frank Bornemann, 1988)로 붙인 재결합 앨범을 발표했다.
스페이스 록 답게 새로운 종족을 지배할 영웅의 탄생을 그린 음악인데, 이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게 이집트의 태양신 라인지 아닌지는 가사를 살펴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멀리 피라미드가 보이는 걸로 봐서 어느 정도 신화에 기댄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하게 된다.
문양 하나만 슬쩍 끼워넣었으면 이렇게 추측하지 않아도 될 것을... 아쉽다.
그런데, 참 묘한 건 이렇게 살펴본 앨범 커버들이 한겨울의 추위를 떨쳐버릴 만큼 따뜻해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앨범 커버를 만들 때 신화의 힘에 짓눌렸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