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긴장의 폭주기관차
걸어서 반경 2km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을 하다 408km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8시간 넘게 차를 탔으니 몸이 불편하다고 반응한 모양이다. 남이 해도 될 일이지만 내가 직접 하면 내게 돈이 들어오는 수입 구조라 이 정도 쯤은 감수할 수 있다. 다만 그게 나중에 다시 한번 일로 돌아온다는 것이 불편하다면 불편하다고 할까.
이번에는 그런 불편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로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라면 경우에 따라 내가 생각해도 아주 능글맞게 일 처리를 하기도 하지만, 일과 관련되지 않아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무척 조심스럽다. 더구나 하늘이 준 낯가림 증상 때문에 이런 일은 3년에 한번쯤 생기는데... 많이 긴장했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얼굴이 빨개질 테니... 얼굴이 빨개지는 건 부끄럼 탓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안절부절이다. 게다가... 다른 이가 들으면 어이 없어 코웃음 치겠지만 내게는 일년 주량에 가까운 맥주를 마셨으니... 아, 이거참 난감 당황 x 2의 상황이다. (알코올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힘들다. 어이 없는 주량에 세상 술 혼자 다 마신 것같은 폼을 잡는 건 화가 난다. 그것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더니 주량이 바닥을 긴다.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때에는 스스로 화를 내지 않아도 되니 조금 더 마시게 된다. 그때 역시 바닥이긴 하지만.)
긴장 사이에서 어떻게든 버틴 것 같다. 시계를 자주 봐야했다. 시계를 자주 보는 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만, 하루면 어떻고 이틀이면 어떠리,로 이어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막차를 놓치고 당황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자주 확인하는 게 나았다. (본심이야 그게 아니었으니, 혹시라도 오해는 없길.)
다시 토요일, 하루종일 멍하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 버린 탓에 정말 오랫만에 단잠을 잤다.
그렇게 단잠이었는데, 깨고 나서도 여전히 멍하다. 연거푸 커피를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말 일도 아닌 블로그 스킨 변경인데, 손을 대기만 하면 오류가 생기는 묘한 녀석을 만났다. 결국 변경을 포기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어딘가 연결된 곳이 있는데, 그걸 찾아내질 못한 모양이다.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져 (별 도움은 안되지만) 내 블로그 스킨에 아이콘 몇 개를 변경하는 걸로 회복하려 했다.
커피도 소용없다며 멍하게 앉아있다 보니 벌써 저녁.
Whit*ryder : 자전거 안탄 지 한달이 넘은 것 같네요.
Y : 왜요?
W : 날이 너무 더워서...
Y : 그럼 밤에 타면 되죠.
W : (끄덕끄덕)
금요일의 대화... 맞다.
이 더위에 자전거를 타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만 부끄러워 그런 게 아니라서 상관없다. 더우면 저녁에... 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이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일이라면 또다른 이유를 대겠지만, 자전거를 타는 건 나도 좋아하는 일이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긍정.
스트라이다 STRIDA를 끌고 나가기로 했다.
천둥과 번개에 이어 몰아친 비바람이 잦아들었다. 비가 오고 있어도 아마 나갔을 것이다. 땅은 젖어있겠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없어서 달리기는 더 좋을 것 같았다.
속건성 내복으로 갈아입고 발가락 양말을 신고 반손가락 장갑도 끼고.
그런데 예감이 좋지 않다.
꿰어맞추면 틀릴 일 없는 오늘의 운세처럼, 나가기 전부터 기분이 묘했다. 지금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건, 불안하다. 어디로 얼마나 달릴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오늘은 사고가 날 것 같다... 누군가 부딪치거나 어디로 처박히거나, 이런 불길한 느낌. 지금처럼 멍한 상태로 정신 놓고 있다보면 분명 사고가 날 게다. 그동안 몇번이나 그랬지만 용케 피했는데, 그건 요행이었고...
불안하다.
저녁 7시 3분에 시작해 11시 18분에 되돌아왔다.
다리 하나는 건널 생각이었는데, 그거라면 성공이다. (사진은 반환점이었던 잠실철교 남단.)
네시간 동안 달린 거리는 50km.
그리고,
예감대로 사고가 나버렸다...
이상하게 쥐가 나려고 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쥐가 나면 바늘로 콕 찔러 피가 나게 하면 괜찮다고 하던데.... 바늘로 찌를까. 바늘이 없잖아. 고양이를 부를까. 이런 고민을 하며 열심히 페달을 돌리는데 갑자기 울리는 따르릉 소리. 저걸 울릴 공간이 아닌데 왜 신경 쓰이게 따르릉 거리는가를 고민하며 옆으로 빠지다 처박혀버렸다. "아악!" 소리를 낸 건 내가 아니라 뒤에서 걸어오던 사람들. 자전거는 별 일 없었지만 무릎이 깨졌다. 피가 뚝뚝...은 아니었고 조금 패였다. 처박힌 곳이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거의 없는 숲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다시 달렸다. 후*딘도 없는데, 발라줄 사람도 없는데... 발라주긴 뭘 발라줘, 직접 바르면 되지. 그리고 약은 무슨... 그냥 두면 나아질 거야. 인간 세포의 복원력을 믿어. 무릎은 시큰거렸지만 상처가 생각보다 작아 다행이다. 또다시 이어지는 혼자 생각들...
반가운, 그리고 토요일의 유일한, 핸드폰 문자가 날아왔던 건 풀숲에 처박힌 그 무렵이었을 게다. 거의 집에 도착할 때 쯤 해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꺼냈을 때 문자가 와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답신을 보냈는데, 집에 도착해 문자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미안하게도. 밤새 삑삑거리진 않았겠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 건 아니다. 운동을 했으니 그렇지. 예감대로 불행하게 사고가 났지만,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진정하자. 씻고, 커피 한잔 끓여 마셨다. 카메라를 꺼내 깨진 무릎을 찍었고, 그가 보낸 과자 상자를 그제야 뜯어보고는 역시 사진을 찍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워서 둘 다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이 빨개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