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마음이 차분해진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는데, 대부분 떨어지는 비를 직접 맞기보다는 따뜻한 곳에서, 창밖으로, 그저 조용히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곤 곧 추억에 잠긴다.
그 기억은 주변의 분위기에 따라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며 차분한 마음 속에 잔잔하게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한다. 때때로 비 오던 날이면 더욱 더 그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거나, 서로 뒤돌아서던 서늘한 그 마지막 날을 떠올리거나, 옷 젖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경쾌한 어린시절로 마구 변해간다. 그리고 내면의 기억이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에는 우산 하나 들고, 비옷이 있다면 비옷도 걸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비오는 날은, 어쨌든, 마음이 차분해진다.
음악도 그렇다. '이럴 땐 이런 음악' 투로 Rain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를 찾아다닌다. 그 노래들은 약속이나 한듯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로 가늘게 떨리며 귓가에 머문다. 내가 기억하는 Rain은 유라이어 힙
Uriah Heep의 <Rain>이거나 일리너 매케보이
Eleanor McEvoy의 <The Rain Falls>다. 혹시 모르겠다.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꺼내들거나 <비오는날의 수채화>를 들을지도.
감상은 잠깐 접어두고 비오는 날의 음반 커버를 살펴보자.
잭 존슨
Jack Johnson의 데뷔앨범 「Brushfire Fairytales」(Enjoy Records, 2000)다.
데뷔앨범 커버 치고는 참 처절하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 무슨 초라한 꼴인가. 하지만 그는 가수보다 영화에 먼저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굳이 음반을 사달라고 이쁘게 단장할 이유도 없고, 음악은 부업이었을지 모르는 일일 테니. 그의 과거를 이해하면 이 황당한 커버는 오히려 훨씬 극적으로 다가온다.
앨범 프로듀서 J P 플뤼니에 J P Plunier가 사진까지 찍었다.
오피셜 웹사이트에서 훔쳐온 잭 존슨의 바이오그래피를 번역해보면... 이렇다.
바이오그래피 페이지는 텍스트로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은 게 아니라 인터뷰로 채워놓았다.
Q: 어디서 자랐냐?
A: 하와이
Q: 언제 기타를 처음 쳤냐?
A: 열 네살 때
Q: 기타로 처음 연주한 곡은 뭐였는데?
A: 두 곡을 동시에 배웠다. 하나는 메탈리카의 <One>이고, 또 하나는 캣 스티븐스 Cat Stevens의 <Father And Son>이다.
Q: 「Brushfire Fairytales」를 만들기 전에 뭘 했는데?
A: 서프 필름 surf films을 만들었다.
Q: 좋아하는 서프 영화는 뭐야?
A: The Seedling, Litmus, Filthy Habbits, Blazing Boards, Bunyip Dreaming, Green Iguana, and Endless Summer. [음... 전혀 모르는 영화들이다...]
Q: 누구에게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냐?
A: 닉 드레이크,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밥 딜런, 벤 하퍼, 라디오헤드, G.러브 앤 스페셜 소스, 오티스 레딩, 닐 영, 밥 말리, 구로사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탐 커렌 등을 열심히 들었다.
Q: 지금 듣는 다섯장의 앨범을 말해봐.
A: 트로이얀 덥 컴필레이션 시리즈, 그레고리 아이작스의「Night Nurse」, 플레이밍 립스의 「Yoshimi Battles The Pink Robots」, 타지 마할의 「Giant Step」, 그리고 메이슨 제닝스 Mason Jennings를 듣고 있다.
난 이런 장대비를 맞아본 적이 있던가.
비오는 날의 그 가라앉은 분위기를 즐기긴 하지만, 이런 적은 없는 것 같다. 일기예보를 늘 살펴보며 비가 온다고 이야기하면 항상 우산을 꺼내들었다. 비가 오건, 비가 오지 않던. 아마 준비성이 철저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도 그랬던 것 같다.
전혀 이런 상황을 맞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 지리산 산행에서 만난 그 억수같은 비... 그때 초라했던가? 아니, 전혀.
그때 기분이 이 앨범 커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