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커버/스토리 [diary edition]

석류

2021. 7. 23. 09:57

무식하게도, 석류가 과일이라는 걸 모르고 지내왔다. 과일을 밥보다 좋아하셨던 어머니였지만 당신이 석류를 드시는 걸 본 적 없었고, 당연히 우리에게 석류를 먹어보라 권한 적도 없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이긴 하지만, 한때 귀했던 바나나는 간간이 보았고, 한때 더 귀했던 파일애플도 아주 가끔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석류를 보거나 과일 삼아 먹어본 적도 없다. 신기한 일이다. 

 

석류가 눈에 들어온 건 광고 때문이었다. 석류를 좋아한다는 미녀 어쩌구저쩌구 하는 광고 말이다. 그 무렵쯤에야 석류가 먹는 과일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렇지만 이미 널리 퍼진 매실 음료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매실의 인기를 타고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석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석류의 특정 성분(이를테면 '아파나클록시아디톡식테이트 산'이라고 부른다고 뻥을 쳐볼까?)을 응용한 음료였겠거니 생각했다.

 

그 광고에서도 한참을 지났을 무렵, 드디어 석류를 먹었다. R.E.M.이 <Lotus>에서 "내가 로터스를 먹었다니까요! Oh, I ate the lotus"라고 황홀경에 빠져 노래했듯, 그래요, 나도 석류를 먹었다니까요!라고 춤추고 노래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찐 옥수수 알갱이를 하나하나 뽑듯 석류 알갱이를 하나하나 뽑아 손바닥에 모아놓고 먹었다. 그 시큼하고 단 느낌. 이렇게 먹는 게 맞나?

 

 

 

Bustehude / Schütz / Dijkman - Ensemble Correspondances, Sébastien Daucé [Septem Verba & Membra Jesu Nostri] (Harmonia Mundi, 2021)

 

● Cover Photography by Véronique Ellena

고음악 전문 레이블 아르모니아 문디가 그동안 그랬듯, 이 앨범 커버는 중세 그림을 커버아트로 활용했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크레딧을 보면 커버 사진은 베로니크 엘레나 Véronique Ellena가 촬영했다고 한다. 어? 사진?

(이야기한 적 있었나? 난 클래식 상식이 거의 바닥이라 아예 거론하지 않는 쪽을 택해왔다. 이 앨범 속 작곡가들, 지휘자와 앙상블, 모두 내 관심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이번 커버/스토리 주제가 석류이기 때문이다. 앨범 설명은 음반 수입사에서 제공한 쇼핑몰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문장을 따오면, 이 앨범은 "17세기 바흐 이전 유럽의 루터의 종교 음악 발전에 기여한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북스테후데, 쉬츠, 디크만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석류.
베로니크 엘레나는 2007년에 석류를 찍었다. 그는 2008년 포트폴리오에 Natures Mortes라고 제목을 붙였다. 영어로 dead natures. 이 사진은 2008년 포트폴리오의 일부다. 석류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꼭 링크를 클릭해 확인하길 바란다. (링크 속 사진을 '반드시' 보라고 권한다.) 죽은 토끼, 죽은 새, 다시 뿌리로 돌아갈 수 없게 몸이 꺾인 채 화분에 꽂혀 아직 죽진 않았지만 곧 시들어버릴 꽃, 물고기, 문어, 심지어 빵 등을 보면 석류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석류 역시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없는 죽은/죽어가는 자연의 일부. 가만히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막 슬퍼질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
앨범 커버에 쓴 석류는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Membra Jesu Nostri, BuxWV 75>와 베로니크 엘레나의 의도를 담은 사진이 함께 만들어낸 어떤 이미지 때문에 선택했을 게다. 단순히 석류 이미지가 필요해 베로니크 엘레나의 사진을 썼다면 이 앨범커버는 오리지널 이미지에 압도당해버린 바보 같은 앨범으로 취급해도 좋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자. 2007년 사진을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쓰라고 허락할 가능성은 0%. 그러니 바보 같은 앨범이 될 확률도 0%다. 석류를 앨범의 주제와 연결시켰건 그저 석류의 모습이 필요했건, 이 앨범 커버 속 석류가 주는 사진의 울림... 대단하다.

 

 

Markete Irglova [Anar] (Anti-, 2007)

● Front Cover & Tree Paintings by Nahid Hagigat 

글렌 한사드 Glen Hansard를 벗어난 마르케타 이르글로바 Marketa Irglova가 처음 발표한 앨범 [Anar]. 당연히 <Falling Slowly>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기대했을 텐데, 그게 말이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많지 않은 리뷰들의 초점은 거의 대부분 글렌 한사드 없는 마르케타 이르글로바가 보여줄 건 무엇인가였고, 결국 보잘것없어서 실망했다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글쎄... 이 앨범은 그런 기대를 할 이유가 없는 앨범이었다. <Falling Slowly>에 '지나치게 몰입해놓고' 그런 평을 내리는 건 부당하다. 스웰 시즌 The Swell Season의 이름으로 이미 발표한 <Falling Slowly>에 반응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오죽했으면 발표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이 노래를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로 올리는 게 맞는가라는 자격 논란도 있지 않았나. [Anar]는 기대 이상으로 섬세한 앨범이다.

음악 전에 나를 먼저 사로잡은 건 앨범 커버아트다. 앨범 타이틀은 페르시아어로 석류를 뜻하는 [Anar]였고, 거기에 걸맞게 나히드 하지가트 Nahid Hagigat의 새빨간 석류 그림을 커버아트로 삼았다. 앨범 커버를 처음 보고 그해의 앨범 커버 10선에 올리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만 그랬지 실행은 못했다. 매년 '생각만' 열심히 하는 아이템. 마르케타 이르글로바의 두 번째 솔로 앨범 [Muna](Anti-, 2014) 커버아트 역시 나히드 하지가트가 그린 그림으로 채웠다.

뜬금없이 앨범 커버에 석류를 등장시킨 게 아니라면 석류의 행방을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맞다, 석류는 앨범 속에 있다. 영어로 된 곡 사이에서 유일하게 비영어 제목을 가진 페르시아 전래 음악 <Dokhtar Goochan>에 석류가 있다. '구찬에서 온 소녀(구찬 출신 소녀/구찬의 소녀)'라는 뜻을 가진 이 곡 가사 중 "석류 한 개, 석류 두 개, 진주 삼백 개 یه دونه انار، دو دونه انار، سیصد دونه مرواری"라는 가사가 있다. (음... 페르시아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모양인데 제대로 복사한 건지 모르겠다. 앨범 북릿에 적은 가사는 손글씨라 더 알아보기 힘들다... 미안하지만 그냥 이대로 두기로 한다. 손댈수록 더 복잡해진다. 어쨌든, 구글번역을 통한 가사 해석은 맞음!)

 

 

     * '수류탄'이나 '유탄'의 '유'도 석류 류(榴) 자. 이는 옛 수류탄의 구조가 금속케이싱에 코닝된 흑색화약 알갱이가 채워져있어 마치 석류와 닮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영어의 'Grenade'도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미셸 깽의 소설 처절한 정원(Effroyables Jardins)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Calligrammes)로 시작한다. 'Et que la grenade est touchante / Dans nos effroyables jardins'가 원문인 이 시는 한국어로는 '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 / 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로, 영어로는 'How touching this fruit / In our strange and terrible gardens'로 번역되었다. 영어판 역자가 이 시는 세계 제1차대전 당시에 쓰여진 전쟁시고, 각주로 수류탄과 석류가 불어로 같은 단어임을 밝히고 있다.
* 스페인어로 석류를 그라나다라고 한다. 이베리아 최후의 이슬람 거점 그라나다의 어원 및 상징도 석류이다. 그라나다에 가면 곳곳에서 석류를 모티브로 한 공공기물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수류탄, 석류, 그레나다는 전부 Granada 이다.
                                                               출처 : 나무위키 [클릭클릭]

 

석류 커버 두 장에 관해 이것저것 정리하는데,

가만... 석류가 수류탄(grenade)으로 연결된다고? 그레네이드... 그라나다... 스페인 록 밴드 그라나다 Granada도 석류?

 

 

 

Granada [Hablo De Una Tierra] (Movieplay, 1975)

오, 이럴 수가... 석류 맞다.

그동안 난 뭘 보고 있던 거지? 저 많은 석류를 왜 기억하지 못했지? 그라나다가 뭘 뜻하는지 찾아봤다면 바로, 그리고 평생 기억할 이 앨범 커버를 이렇게 무심하게 지나쳤다니... 석류를 뜻하는 밴드 이름에 걸맞게 작은 탁자에 석류를 잔뜩 쌓아두었다. 난 석류라고! 석류! 억지로 날 기억하려 하지 마. 그래도 석류를 잊으면 안 돼!라고 소리치는 그라나다의 음반커버.

그러면서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이 앨범 커버 속 석류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석류를 먹어보기 전에 이 음반을 만났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석류라고 외쳐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이제 나는 석류를 먹었다니까! 이제 석류 커버를 찾으려면 그라나다를 가장 먼저 꺼내겠어.

그라나다는 첫 번째 앨범 커버로 석류(그라나다)를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했는지 3년 뒤에 발표하는 세 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Valle Del Pas](Movieplay, 1978) 커버에 인간의 두 배쯤 되는, 약 4미터짜리 초현실주의 대형 석류를 앨범 커버 중앙에 배치했다. 난 석류라고! 석류! (첫 앨범이나 세 번째 앨범 크레딧에 포토그래퍼 이름은 없었다.)

 

 

 

무식하게도, 석류를 먹을 줄 몰랐던 나는, 이제 석류를 먹을 줄 안다. 값만 싸면 매일 먹겠지만 매일 먹지는 못한다. 그건 그렇고, 난 석류를 먹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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