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커버/스토리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내 기억력의 한계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모르겠다.
그냥 꿈으로,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나던가?

정말 굶주린 아이가 밥을 보고 덤벼들 듯 책을 읽어댈 때가 있었다.
그때 읽었던 수많은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건 일시적인 기억력 장애가 아니라, 그때는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허영에 사로잡혀 글자만 열심히 읽어댔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글자를 읽는 것으로 만족한다.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
같이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대사를 줄줄 늘어놓을 때, 난 도대체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기억했을까.
저런 예민하고 섬세한 기억력도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지만 때때로 천재처럼 빛나는 기억력을 발휘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러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자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기억의 소재와 내용과 방식과 입장이 달랐을 뿐이라고,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커버/스토리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앨리스일 것이라 추측하는, 소녀들의 상상세계를 적어보기로 했다.




시저 시스터스 Scissor Sisters의 데뷔 앨범 「Scissor Sisters」(Ploydor, 2004) 속의 소녀가 걸어들어가는 곳은 어디일까?
중앙선이 있는 걸 보니 도로다. 도로 끝에는 환락이 있는 거리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몽유병이라도 앓고 있을까? 경쾌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는 폼이다. 주저할 틈도 없을 것 같지만, 주저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곡 <Comfortably Numb>을 커버했는데 비지스 Bee Gees 스타일의 보컬과 프랭크 고즈 투 할리우드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Relax>를 섞었다. 짬뽕인데, 화려한 짬뽕이며, 원곡 생각하지 않고 들으면 이것보다 멋진 커버 곡은 없다.
뮤지션 사진도 자주 찍는 타라 다비 Tara Darby가 소녀 사진을 찍고 스푸키 Spooky가 일러스트를 그려넣어 완성한 커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기보다는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앨리스라고 봐야겠다.




케이트 부시 Kate Bush의 앨범 「Never For Ever」(EMI, 1980) 커버 속의 소녀는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Q 매거진에서 발행한 'The 100 Best Record Covers Of All Time'에 이 앨범이 선정되었는데, 쓸데없는 짓 같긴 하지만 이 수많은 생명체를 일일이 분석한 박스기사가 있어 간략하게 옮겨본다. (^^드디어 이책을 처음 써먹습니다.)

"박쥐 다섯마리. 새 열 세마리. 나비 일곱마리. 어류(악마 형상을 한 것은 제외)는 몸에 반점이 있는 고기 두마리와 고래 한마리, 동물은 커다란 귀를 가진 개미핱기 한마리와 고양이 두마리, 개 한마리, 사자 한마리. 뱀은 두마리인데 한마리는 독기를 품고 악어이빨이고 한마리는 겁나게 큰 게 꼭 용처럼 생겼다. 파충류는 음표를 옮기는 정체불명의 생물체 한마리, 악어 한마리, 그리고 역시 정체불명의 파충류 두마리. 악마는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대충 30명 쯤(악마의 숫자는 명이 맞나? 어쨌든 30). 인간은 두명(인데, 거의 머리만 보임)." (위의 책, P.110)

바람부는 날 그녀의 스커트 속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생명체들. 이것들이 나오는 장소는 스커트 속이 아니라 '몸 속'일 수도 있다. 프린스 Prince가 남성의 시선에서 성적 이미지를 노래에 담았다면 케이트 부시는 여성의 시선에서 성적 이미지를 담은 곡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 이 앨범 커버의 컨셉트도 케이트 부시가 먼저 제시한 것이었고, 대충 이야기를 들은 닉 프라이스 Nick Price가 일러스트로 완성했다.
케이트 부시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완전하게 표현했다.
그녀는 스스로 앨리스가 되어 원더랜드를 만들어내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It's A Beautiful Day / same title

여기서 잠깐!


케이트 부시의 「Never For Ever」의 커버와 관련해서 한번쯤 이야기가 나올만 한데 아직 이츠 어 뷰티풀 데이 It's A Beautiful Day와 관련된 어떤 코멘트도 읽질 못했다.
왼쪽 커버는 이츠 어 뷰티풀 데이가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키델릭 무브먼트 시기인 1969년에 발표한 셀프타이틀 앨범 「It's A Beautiful Day」(Columbia, 1969) 커버.

케이트 부시의 앨범 속 소녀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이 블로그에서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표절에 관한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다.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므로.)
무의식적으로 이 커버를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케이트 부시의 앨범 커버는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디서든 이 코멘트가 정식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See For Miles Records. 로고

오른편의 그림을 보자. 케이트 부시의 경우와 다르게 이 그림은 이츠 어 뷰티풀 데이의 앨범 커버에서 상반신만 가져온 경우다. (클릭해서 크게 보길.)
이건 앨범 커버가 아니라 과거 앨범 재발매를 전문으로 하는 영국의 레이블 See For Miles의 로고다. 90년대 초반에 BGO(Beat Goes On) 레이블과 함께 과거의 명작 재발매를 주도하더니 요즘은 사정이 어려운지 문을 닫았는지 이 레이블의 재발매 앨범을 찾아볼 수 없다.





케이트 부시의 앨범 커버에서 고래를 발견했다면, 이 앨범 커버의 고래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최근 공개된 도나웨일의 데뷔 앨범 「Donawhale」(Pastel, 2007)이다.

MPULG와 가진 인터뷰를 보면 밴드 이름과 앨범 아트웍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인터뷰를 일부분 가져왔다.

"도나(Dona)는 ‘여성/부인’의 존칭의 의미가 있고요. 여성의 섬세하고 따뜻하고 아련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웨일(Whale)은 고래입니다. 일단 고래를 좋아해요. 바다도 좋아하고요. 신비롭고 아름답고 바라만 봐도 어떤 위안을 얻는, 고래는 예전엔 육상동물이었지만 어떠한 이유로 현재엔 유일하게 바다 깊은 곳에서 살고있는 포유류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잘 적응하고 진화한 동물이라고 해요. 또한 초음파를 발사하여 먼 거리의 물체를 확인하거나 대화를 나누죠. 도나웨일도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대화를 나누고, 음악을 통해 이 세상에 잘 적응하며 지금보다 나은 모습으로 진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나웨일’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MPLUG vs. 도나웨일 인터뷰 전문 읽으러 가기]

그렇다면 밴드의 음악관에서 핵심은 '대화'가 되겠다.
대화를 원하는 밴드에게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은 좋은 일 같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면... 아아아, 그럴 필요없다. 음반사에서 붙인 스티커를 인용하는 게 낫겠다: "아지랑이 가득한 날의 아름답고 짧은 이야기. 아련한 보컬 사운드와 간결한 록 사운드"라고 발매사 파스텔 뮤직은 도나웨일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앨범 커버는 lemar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조성흠의 작품.
이 앨범 속의 소녀는 앨리스로 따지면, 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World's End Girlfriend의 「Hurtbreak Wonderland」(Human Highway, 2007)
역시 파스텔 뮤직에서 국내 발매한 월즈 엔드 걸프렌드 World's End Girlfriend의 앨범 커버도 케이트 부시의 앨범 커버와 닮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도나웨일은 복잡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앨범 커버를 인용한 것 같기도 하다.

월즈 엔드 걸프렌드는 카츠히코 마에다 Katsuhiko Maeda의 원맨프로젝트 밴드라고 하는데, 이 지독한 실험성은 여전히 내겐 어렵다. 일본의 감성과 일본의 일렉트로닉과 일본의 노이즈가 외국의 그것들과 한데 뭉쳐 있으니... 아마도 이 앨범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듣지 않을 것 같다. 나빠서가 아니라 어려워서다. (어려운 건 싫어...)
해설지에는 이 앨범을 "독과 악으로 넘쳐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에이펙스 트윈과 시우르 로스, 그리고 마치 디즈니표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을 한데 믹스해놓았다는 평가를 일본에서 얻었다"고 적고 있다. 어렵다... 하지만 독과 악으로 넘쳐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데에서 이 앨범이 분명 앨리스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앨범 커버는 에츠코 후카야 etusko fukaya의 에칭 작품. 에칭의 섬세한 표현력은 이 커버의 작은 곳까지 시선을 가게 한다. 나비와 물고기와 뱀과, 고양이... 케이트 부시처럼 누가 이 작품 속의 동물을 분석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마지막 앨리스.
앨범 타이틀이 강렬하다. "지옥의 앨리스"라니.
어나이얼레이터 Annihilator의 앨범 「Alice In Hell」(Roadrunner, 1989)다.
앨범 속을 몇번이나 살펴봐도 누가 그렸는지 적어놓지 않았다. 데뷔 앨범을 발표하는 기쁨에 너무 많은 Thanks to를 적다보니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을 넣을 자리가 없어져버렸거나 빼먹은 것 같다.

이 앨범 커버는 수록곡 <Alison Hell>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아트웍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아기의 공포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고 하는데, 위키를 참고하면 실화라고 한다.
널부러진 인형들의 섬뜩한 이미지, 그리고 문 밖에 기다리고 있는 키작은... 악마?

어나이얼레이터는 이후에도 이 앨범의 아트웍을 이어나갔다. 이듬해 발표한 「Never, Neverland」(Roadrunner, 1990)과 10년 뒤에 발표한 「Criteria For A Black Widow」(Roadrunner, 1999)가 그렇다.

Annihilator / Never, Neverland (1990)Never, Neverland」(Roadrunner, 1990)

Annihilator / Criteria For A Black Widow (1999)Criteria For A Black Widow (1999)



앨리스는 기억력이 나쁜 아이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다.
나도 기억하는 꿈은 몇 개 있다.
나만큼 기억력 나쁜 앨리스가 아직도 동화책 속에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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