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커버/스토리

13년, 같은 자리

2018. 3. 11. 19:51

1. 달

참 밝았다. 정월대보름 하루 전. 내일은 모처럼 소원을 빌어볼까. 가끔 빌곤 했던 "굵고 짧은 여덟글자"를 생각했다. 오직 나를 위한 주문. 그래도 그렇게만 된다면... 그땐 남을 위할 수도 있는 게다. (미안.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진짜겠지만 나는 지금 나도 벅차다. 정말 미안.)




2. 정월대보름 달

흐렸다. TV에서는 달을 볼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고개 들어 봐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정월대보름 달이 저기 있는데... 저기... 결국 달이 보이지 않는 허공에 "여덟글자"를 뿌려보았다. 맑았던 해에 부탁했던 소원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들어줄까. 그냥, 가끔 했던 대로, 나의 부귀영화를 위한 소원을 빌었다.




3. 13년

2005년 3월 10일. 여기로 이사와 13년을 꽉 채웠다. 세상을 다 잃은 듯, 이라고 멋지게 표현해보기도 했지만, 사실일 수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무거웠던 나날. 새로 살 집을 찾을 때 조건은 가장 높은 층일 것. 다른 집보다 높을 것. 몇 군데 집을 보았고, 모두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결국 이 곳을 택했다. 집주인이 내건 조건은 가능하다면 오래 살 것. 곧 재건축을 하게 될 텐데 2년마다 새로운 사람과 계약하는 게 귀찮으니 집을 부술 때까지 살라 했다. 대신 집세는 올리지 않겠다 했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생각하면, 이 조건을 내건 집주인은 그야말로 천사다. 그렇게 계약하고 살기 시작해 13년이 흘렀다. 올해는 재건축을 위해 집을 부술 모양인데, 절차가 진행중이다. 이사오기 전부터 재건축 이야기가 나온 동네는 13년 머무는 동안 점점 낡아갔다. 재건축을 반대하는 집들은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꼈던 그 투쟁현장처럼 붉은 깃발을 문 앞에 꽂았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바래버린 깃발을 교체한 것도 2년 쯤 된 듯 하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고양이들은 여전히 동네를 떠돈다. 7년 전 쯤 보았던 까만 고양이가 집 근처를 떠돈다. 다행이다. 너, 몹시 조심하며 살았구나. 그런데 어떡하지. 올해는 이 곳을 떠나게 될 것 같다. 다음 주에 이주를 하기 위한 마지막 총회가 열린다. 이제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도시가 주는 평균 욕망조차 없는 셈 치고 지방이나 산골로 갈 수도 있다. 어디로 갈거나.





4. 고양이

여기서 13년이 지나는 동안 두 녀석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사이에 들어와 셋이 살다 지금은 혼자된 녀석. 다른 고양이가 그랬듯, 녀석도 창틀로 뛰어올라와 창밖의 고양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예전에는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웠던 창밖. 지금 이 녀석은 아이들 소리를 듣지 못한다. 코 흘리던 어린 아이는 이미 사춘기. 가끔 마주치는 동네 아이들은 열 번 만나면 다섯 번쯤은 인사도 하지 않는다. 절반. 내가 사춘기였을 때 나도 그랬을 테지. 씩 웃거나 못 본 채 하며 넘어간다. 내가 먼저 인사할 때도 있긴 하다. 성장한 아이들은 집앞 마당에서 놀지 않는다. 그러니 이 고양이는 아이들 소리를 듣지 못한다. 5년이 되어가는데 거의 울지 않는 녀석. 문을 열어달라는 몸짓과 소리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다.




5. 13년 째 같은 자리.

의기소침한 채 이 곳에 자리 잡던 때와 비슷하다. 그래도 잠깐 활활 탔던 적도 있었지. 이제 또 십 몇 년 사이에 잠깐이나마 탈 수 있는 일이 생길까. 그러길 바란다. 구름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달에게 빌었던 소원이 이번에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이가 원하는 일이라 내 차례가 오기 어려울까. 늦어도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끝내 오지 않는다면? 그럴 리가. 또 무슨 일이 있겠지. 고개 숙이고 걷다 살아갈 이유 하나쯤 주울 수 있겠지. 13년. 용케 버텼다. 잘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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