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커버/스토리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80년대의 한 TV 뉴스에서 'The Day After'라는 가상의 화면을 담은 영상을 소개한 적이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The Day After라는 가상의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시점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검색은 포기. 그날이후란 핵폭탄이 떨어진 지구의 바로 그날 이후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핵폭풍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지만 그때의 공포와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뭐, 그냥 생각한 그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정도... 많이 느슨해졌고, (공포와 차원이 전혀 다른) 비관적인 성향으로 변했다.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U2의 「The Unforgoettable Fire」(Island, 1984) 같은 앨범을 꺼내들고 원폭 이후의 히로시마 어쩌구 저쩌구 했을 것이다. 방독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싼 맛에 샀던 아이슬란드의 록 밴드 시우르 로스 Sigur Ros의 싱글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었다.




시우로 로스가 발표한 1999년작 「Ageatis Byrjun」이 알게 모르게 꽤 많이 팔려나간 데다가 같은 나라 출신인 비옐크의 성공과 서포트,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메탈리카까지 시우로 로스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미국에도 잘 알려진 밴드. 시우르 로스가 미국시장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이 바로 이어진 새 앨범 「( )」(Fatcat, 2002)이었다. 괄호 앨범이라고 하든, 언타이틀이라고 부르든 그건 마음대로 해주면 되는데, 여덟 곡의 앨범 수록곡까지 모두 타이틀이 없다. 표기는 그저 트랙 표시인 1, 2, 3... 밖에 없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곡을 지칭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untitled #1> 식으로 표기하게 된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밴드는 곡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라고 했다고 언급했던 것 같다.)
워낙 붕붕 떠다니는 음악이라 잠자기에는 딱이지만, 가끔은 들어줄만한 부분도 있다. 이 부분은 시우르 로스의 음악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라 딱히 박자를 따라가면서 공감할 부분이 적다는 말이다. 집중하면 같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 한번 시도해보길.
방독면을 쓴 어린아이의 모습을 담은 이 CD는 「( )」의 첫번째 트랙과 앨범에 수록하지 않은 #9의 세 가지 버전을 포함해 모두 네 곡을 수록하고 있다. DVD도 추가한 싱글인데 거기에는 <untitled #1>의 뮤직 비디오와 이전 앨범 수록곡의 비디오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방독면 커버는 뮤직 비디오의 한장면을 앨범 커버로 사용한 셈이다. 뮤직 비디오를 봐도 아이들이 왜 방독면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른한 음악으로 붕 뜨는 체험을 했으니, 이제는 좀 살벌한 방독면 커버를 보자. 지금은 피터 스틸 Peter Steele이라는 이름이 거의 잊혀진 것 같긴 한데, 한때 피터 스틸은 정말 대단히 끔찍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밴드는 타입 오 네거티브 Type O Negative. 밴드명답게 극악무도한 네거티브 사운드를 한껏 자랑하더니, 어느날부터인가 멜랑콜리한 사랑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찬반양론에 휩싸였다. 물론 이전에도 사랑 노래가 있었지만 그건... '정상적인' 사랑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진짜 사랑 노래를 부르게 되자 오랫동안 이 밴드를 지지했던 팬들이 황당해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등장한 카니보어 Carnivore는... 피터 스틸이 타입 오 네거티브를 결성하기 훨씬 이전에 활동했던 밴드로 브룩클린에서 악명을 날리던 밴드였다. 평소 행동과 음악 두가지 전부. 인종차별, 테러와 전쟁, 생명경시, 남성우월, 신성모독, 뭐 이것 외에도 일반적으로 혐오할만한 것들은 모두 노래로 표현하곤 했으니 정말 대단한 밴드였다.
이 앨범 커버는 카니보어의 두번째 앨범 「Retaliation」(Roadrunner, 1987)이다. 짐승의 이빨을 클로즈업한 섬뜩한 커버의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 「Carnivore」(Roadrunner, 1985)에 비하면 거의 만화 수준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만화다.) 이 앨범은 그나마 밴드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표현한 커버가 되겠다. 데뷔앨범에서 핵전쟁이 일어나고 지구가 3차 세계대전과 4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인간들의 살육을 그렸던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앨범 커버가 데뷔앨범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굳이 그 내용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 앨범 커버는 만화같지만, 실제로 가사에서 다루고 있는 모습을 몇 줄만 해석해도 우웩~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잔인한 놈들...
이 무렵 LA 메틀이니 헤어메틀이니, 아니면 NWOBHM 같은 이쁘고 멋진 밴드가 난리치는 와중에 이런 극렬 스래쉬 메틀을 하다니...




휴... 카니보어에 비한다면 이 앨범은 그나마 묘사하긴 편하다.
블러 Blur가 일렉트로니카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밴드의 리더 데이먼 알반 Damon Albarn이 고릴라즈 Gorillaz 활동을 한 것도 영향을 끼쳤을 법하다. 거기다 일렉트로니카의 귀재 팻보이 슬림 Fatboy Slim이 참여해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여주었으니 음악성을 약간 바꿨어도 다행이었다. (어디에서, 어떤 인터뷰에서 이 말을 했는지 아직 찾아보질 못했지만 아무튼) "브릿팝은 죽었다"고 선언한 그가 여전히 브릿팝 같은 사운드를 연주하다 죽은 브릿팝에 미련을 벗어던지려는 것 같지는 않다. 롹밴드가 일렉트로니카로 진화한 사운드라 환호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고릴라즈를 듣는 편이 낫다.
음악보다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커버라는 말은 몇 번 한 것 같은데, 블러의 이 앨범도 무언가 진한 메시지를 풍긴다. 사실 이건 방독면이 아니라 잠수복에 쓰는 헬멧이다. 그래도 느낌은 방독면 못지않으니 그냥 가기로 한다. 이 커버를 그린 인물은 뱅시 banksy(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데, 뱅크시라고 읽는지 뱅시라고 읽는지 확인해본 바 없다... 그냥 뱅시로 표기해야겠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벌거벗은 한 소녀가 미키마우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라든지, 화염병을 던지는 대신 꽃다발을 집어던지는 모습 같은 굉장히 독특한 시각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알고 싶으면 Wikipedia의 뱅시 관련 항목을 읽거나 오피셜 웹사이트에서 확인하는 것이 더 낫겠다.) 어쨌든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는 것은 '휴머니티'라고 한다. 여자가 들고 있는 꽃이 빨강색이었으면 이미지가 더 선명했을까? 블러의 음악과 '심하게' 매치되지는 않지만, 뱅시의 독특한 그래피티 아트는 꽤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글 쓰려고 가사 확인하고 뮤직 비디오도 한번 보는 동안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내가 별다른 생각도 없이 방독면이 핵전쟁에나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방독면... 생각해보니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한국의 지랄탄을 쏘는 전경들의 얼굴에도 방독면이 있었는데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물론 화재가 났을 때도 방독면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멘 Amen의 이 싱글 커버는 그 바보같은 생각을 되돌려준 고마운 커버다.
이 싱글 커버의 아트웍은 프로모셔널 카피에서만 만날 수 있다. 데뷔 앨범을 발표한 레이블은 로드러너 Roadrunner였는데, 좀더 큰 성공을 원했는지 버진 Virgin Records와 계약을 맺고 발표한 두번째 앨범 「We Have Come for Your Parents」(Virgin, 2000)을 발표했다. 이 프로모셔널 싱글은 앨범의 수록곡 <The Price Of Reality>만 달랑 수록하고 있다. 처음 이 커버를 보면서, 왜 핵전쟁 시기에 저 소녀는 도끼를 들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뮤직 비디오와 노랫말을 보니 이해가 간다. 이 노래는 보수적인 관습에 대항하는 폭동 조장 노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방독면은 폭동을 진압하는 경찰의 것이고, 그의 눈에 도끼를 든 소녀 폭도가 비친 것이다...
에이멘은 꽤 정치적인 밴드였고 음악 스타일도 딱 로드러너 스타일이었다. 계속 머물러 있었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버진으로 가서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방출되었는지 세번째 앨범은 버진이 아니라 다른 레이블에서 발표했다.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를 보려면 [클릭]. 역시 유튜브 링크.)

이런 저런 방독면을 살펴보았는데, 방독면이란 결국 전쟁이거나 권력, 억압, 통제 같은 것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블러의 커버처럼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은 존재하기도 하고,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끔찍한 참극으로 다가올 미래이기도 하다..

글을 끝내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잠깐!!



방독면도 때에 따라서는 의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밴드 슬립낫 Slipknot의 데뷔앨범 커버다. 처음 슬립낫을 들었을 때는 이 밴드 개그 하나? 싶었는데 내한공연 때 보니까 정말 멋졌다. 그래도 저런 걸 왜 쓰고 나타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여전하다. 에이멘이 계속 로드러너에 있었으면 슬립낫처럼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U2 / Sweetest Thing [single]
그리고 U2 관련해서 뭐 좀 찾다가 아마존에서 발견한 U2의 싱글 <The Sweetest Thing>의 커버도 훔쳐와서 추가.
처음에는 「The Joshua Tree」(Island, 1987)에서 싱글로 커트한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의 B-side곡으로 실렸는데,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1980-1990」(Island, 1998)
에 새롭게 믹스해서 수록하는 동시에 싱글로 발표했다. 방독면 스타일은 어느 것이나 비슷비슷해서 밴드가 달라도 커버들이 비슷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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