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커버/스토리

내가 커버 아트가 좋다/나쁘다, 별로다, 대단하다, 등의 용어를 사용해가며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음악이나 들어보고 커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냐? 같은 불만의 댓글을 만나게 된다.


이번 그린데이 음반 들어보기나 하셨는지요...ㅡㅡ
이번 앨범 임팩트나 그런건 떨어져도 앨범 레파토리나 내포된 뜻에는 저 앨범커버가 절묘합니다.
뱅크시의 커버작에 대해 그리고 블러에 대한 그린데이의 말도 안되는 님의 "그린데이에게 블러는 어떤 놈들인지 어떤 음악을 하는 놈들인지 알 수도 알 리도 없는 하찮은 밴드였던 걸까?" 이딴 표현은 정말 어이가 없네요.
님이 제일 관과해야하는건 [sic] 그 가수의 스타일과 앨범의 총평이 필요한 것 같군요. 그저 앨범커버를 신경쓸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면 길거리든 어디서든 들을수 있는 흔한 타이틀곡이 아니라, 앨범커버에 관해 글을 쓰실 거면 앨범 전체의 분위기나 가사을 음미해보기라도 하면 좋겠네요.
[원래 위치에서 확인하기]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아티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건, 커버 아트에 대해 이야기하건, 상업적으로 몇 장이나 팔아치웠는지 이야기하건, 프로모션 방식이나 언론플레이 방식에 대해 비난하건, 음악에 비하면 이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서 중심 주제로 삼는 앨범 커버아트가 반드시 해당 아티스트의 음악과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잘난 면상 하나 크게 담아놓고 이번 앨범 커버입니다!!라고 하는 앨범이 어디 한두장인가. 그럼, 그 잘난 얼굴이 음악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개그 프로그램을 인용하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면 "아무 이유 없어~"인 게다. 어떤 커버 아트는 음악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하지만, 어떤 커버아트는 음악과 상관없이 그저 앨범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거나 음반을 한장이라도 더 팔아처먹기 위해 잘난 면상을 보여주는 홍보수단 말고는 아무 의미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언급한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커버아트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음악을 듣고 나서 이야기할 이유는 없다. 커버아트는 음악과 별도로 인정받는 아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50년대까지는 음반 커버는 단순하게 커버였다. 커버 대신 재킷 jacket이라는 용어도 가끔 사용하는데, 이 재킷이 바로 그 시절에 사용했던 의미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입는 재킷처럼 음반에 옷을 입혀 보호해주는 게 음반 커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음반 커버가 음반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거나 노래한 가수의 얼굴을 알리는 역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커버를 예술 작품으로 장식해 시선을 끌거나 별도의 예술성을 가진 아트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음악의 가치를 상승시켜 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이자 명반 「Velvet Underground & Nico」(Verve, 1967)는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Andy Warhol이 커버 디자인을 담당해 지금도 최고의 커버 아트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껍질이 벗겨지는 바나나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과 어떻게 절묘하게 매치되는지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도매저키즘을 노래한 앨범 수록곡 <Venus In Furs>의 성적 이미지가 바나나로 전이되는 기묘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뭐, 이런 식으로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끼워맞출 수는 있다. 그렇지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은 "바나나 앨범"이다. 이 등식을 기억하는 한 바나나를 보면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생각나는 거고, 커버아트 하나로 밴드와 밴드의 음악은 평생 남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나중을 기다리기 귀찮다면 지금 이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 댓글이 그린데이 Green Day 이야기였으니 그린데이 앨범 커버를 떠올려보자.


Green Day 「Dookie」(Reprise, 1994)

「Dookie」는 그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앨범 커버로 그린데이의 펑크 정신을 재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왼쪽 아래의 원숭이는 똥을 들고 "던져버릴까?"라고 고민하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존경해야 할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 Patti Smith의 「Easter」(Arista, 1978)의 커버 아트를 인용하고는 벽에 헤비메틀 밴드 트위스티드 시스터 Twisted Sister를 향해 "Twisted Dog Sister"라고 낙서로 엿먹인다. 이런 거로도 그린데이는 커버아트를 통해 기존 관념에 엿 먹이는 펑크정신을 계승했다,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Green Day 「Warning」(Reprise, 2000)
그런데 2000년에 발표한 「Warning」은? 이 앨범 커버와 이 앨범의 음악성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분석해서 아웃사이더의 느낌을 담아냈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까? 하지만 1백만장 넘는 앨범을 팔아치우는 밴드는 아웃사이더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가식이

다. 이 커버아트에 어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아놓았는지 설명해준다면 당신의 불만을 인정하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래서, 이런 거다.
모든 음악 이야기에서 중심은 음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듣지 않고 그것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억지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커버아트와 해당 앨범의 음악세계가 일치될 이유도 없고 일치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린데이의 앨범 커버가 음악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그건 참 멋진 일이다. 하지만 「21st Century Breakdown」(Reprise, 2009)에 대한 나의 실망은 커버 아트를 그린 아티스트는 왜 자기와 비슷한 스타일로 유명한 선배 아티스트를 비슷하게 흉내냈을까에 집중되어 있었다.

음악과 커버가 별개라는 이야기는 이 글에서도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음악과 커버가 잘 매치되고 있는데도 이 블로그에서 그것도 모르고 딴소리 지껄일 때 그때 다시 해주길. 아마 잘 매치된 것은 이야기해도, 잘 매치되지 않은 것까지 억지로 매치시킬 일은 없을 테니 그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

다음에는 "왜 커버아트가 잘못되었는데 해당 아티스트가 욕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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